전남 신안 해상에서 뒤집힌 24t급 근해통발어선 청보호가 출항한 지 8일여 만에 ‘난파선’으로 돌아왔다.
승선원 12명 중 3명은 사고 직후 구조됐지만 5명이 선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나머지 선원 4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당국은 기상 악조건 속에서도 청보호를 조선소까지 옮겨 2차례 정밀 감식을 벌이는 등 원인 규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밤중 뒤집힌 청보호… 실종자 4명은 어디에
12일 목포해양경찰서 등에 따르면, 지난 4일 오후 11시 17분께 신안군 임자면 대비치도 서쪽 16.6㎞ 해상에서 청보호가 전복됐다.
사고 직후 인근 상선이 선원 3명을 무사 구조했지만 9명이 실종됐다. 해경·군·관공선과 민간 선박, 항공기가 총동원돼 수중·해상·공중 3차원 수색을 벌였나 별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구조 당국은 거센 조류와 선내에 얽혀 있는 어구 등 악조건 속에서도 바다에 잠긴 선체 내부 수색을 꾸준히 시도했다.
사고 이틀 만인 6일 하루에만 기관장 김모(64)씨를 비롯한 실종 선원 5명이 차례로 숨진 채 발견됐다.
배를 다시 뒤집는 원상복구 직후, 예인 전후에도 선내 모든 구역을 샅샅이 살폈으나 더이상 실종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장 이모(50)씨를 비롯한 실종 선원 4명이 전복 직후 조류에 휩쓸리면서 해상 중심 수색으로 전환됐지만 사고 9일째인 이날 오전까지 진척이 없다.
한때 민·관·군 함정과 항공기가 총동원돼 해수유동예측시스템 분석 결과보다 넓은 신안 홍도 바깥쪽까지 수색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다.
연안 수색 역시 성과가 없다. 선체 예인을 마친 이후부터는 해경 중심으로 경비 병행 수색 체제로 전환됐다.
◆“돌아만 왔으면…” 애타는 가족들
사고 직후 목포해경 인근에 마련된 실종자 가족 대기소는 수색·인양 기간 내내 침통한 분위기였다.
‘에어포켓’(Air pocket·뒤집힌 선체 내 빠져나가지 못한 공기가 남아있는 공간)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지만, 배 기관실·침실 등지에서 차례로 5명이 숨진 채 돌아오자 가족들은 절망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시신 만이라도 수습하길 바란다’, ‘이렇게 가슴 속에 묻고 보내야 하느냐’며 착잡한 마음을 전했다.
실종됐다가 숨진 채 수습된 한 선원은 생전 가족들에게 ‘나이가 들어 뱃일이 힘에 부친다. 1년 만 더 하고 은퇴하면 가족들을 돌보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선원취업비자로 입국해 청보호에 올랐던 베트남 국적 실종자 2명의 가족들도 고국에서 해경으로부터 소식을 시시각각 전해 들었다.
때마침 취업 차 국내 체류 중인 이들의 가족은 한동안 목포에서 함께 지내며 귀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숨진 채 수습된 선원들은 가족 연고지에 따라 개별 장례 절차를 거쳤다.
목포에서 장례를 치른 한 유족은 “뱃사람이 바다와 운명을 함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허망한 죽음에서 밀려오는 착잡한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다”며 “고생 많았던 삶은 뒤로 하고 하늘에서는 편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애도했다.
◆다시 뒤집어 조선소 거치까지… 한때 난항도
해경 등 구조 당국은 원활한 수색, 조속한 원인 규명을 위해 실종자 가족 동의 하에 선체 인양을 결정했다.
200t급 해상 크레인 등을 동원, 물살이 거센 사고 해역에서 청보호를 이끌어 ‘안전지대’ 해역으로 옮겼다.
거센 조류로 인양 계획이 수차례 바뀌며 한때 난항을 겪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구조 당국은 지난 8일 사고 해역과 12.96㎞ 떨어진 신안 소허사도 앞바다에서 청보호를 다시 뒤집어 바로 세웠다.
이후 유실 방지망 추가 설치, 선내 정밀 수색을 거쳐 이튿날인 9일 오전 8시 40분부터는 예인이 시작됐다.
역조류(물살이 항행 방향과 반대)와 흐린 날씨 등 좋지 않은 기상 여건 속에서도 경비함정과 예인선이 번갈아 청보호를 이끌었다. 최대 4노트(시속 7㎞) 이상 속도가 나기도 했지만 물살이 거셀 때는 시속 1㎞ 남짓 속도를 냈다.
예인선에 이끌려 이동한 청보호는 11시간여 만에 목포해경 전용부두로 도착했다.
이튿날인 10일 오후 인근 삽진산업단지 한 조선소 선창(독·DOCK)에 거치됐다.
◆2차례 정밀 감식… 전복 원인 밝힐까
청보호가 뭍으로 돌아오면서 정확한 침수·전복 원인 규명을 위한 수사가 본격화됐다.
해경 등 수사 당국은 조선소 내 선창에 거치·고정한 청보호에서 지난 10일부터 이틀 동안 2차례에 걸쳐 관계기관 합동 감식을 벌였다.
감식에는 서해해양경찰청, 목포해경,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해양교통안전공단, 한국선급(전문 검사기관), 목포해양안전심판원과 학계 인사 등이 참여했다.
현재까지 수사 당국은 원복·선체 수색 과정에서 사고 당시 침수에 이를만한 파손·구멍(파공) 흔적은 찾지 못했다.
충돌, 풍랑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사고 가능성은 배제된 상황이다.
수사 당국은 감식 과정에 ‘기관실부터 물이 차기 시작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침수가 시작된 기관실부터 살폈다.
특히 기관실에는 침수 요인이 될만한 선체 추진계통·동력 전달 체계·엔진열 해수 냉각 등이 한데 모여있는 만큼,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예인 직전 선내 조타실에서 수거한 내부 폐쇄회로(CC)TV 모니터 등 장치 3점, AIS(자동선위치발신장치), GPS 플로터, 기관 엔진 모니터 등 증거물 6점에 대한 분석도 시작됐다.
국과수 본원에 긴급 분석을 의뢰했으나, 바닷물에 수일 동안 잠겨있었던 만큼 증류수 세척 등 복원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분석 결과는 빨라야 2~3주 가량 걸릴 것으로 점쳐진다.
수사 당국은 침수, 복원력 상실, 전복에 이르는 일련의 사고 과정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확인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 검증에 주력한다.
무엇보다도 바닷물 유입 경로를 중점 파악하되, 선체 설계 또는 건조 과정 상 문제는 없었는지 들여다 본다.
또 선체 감식을 통해 ▲냉각용 해수 유입 배관 누수 ▲양수기 밸브 오작동 ▲프로펠러 축 이상 ▲검사·정비 과정상 문제 등 사고 원인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가설을 검증한다.
구명뗏목 미작동 의혹, 필수 항해 통신 장비 적법 설치·작동 여부 등도 조사할 계획이다.
해경은 선주와 선박 건조업체 관계자 등 4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아직 형사 입건자는 없다.
그러나 사망·실종자가 다수 발생한 사고인 만큼, 혐의가 드러나면 입건도 검토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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